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둘리틀 특공대 (문단 편집) == 발단 ==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태평양 전선에서 빠르게 무너졌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개전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이러한 국면을 반전시키기 위한 보복 공격 없이는 정치적 부담을 벗을 수 없기에 육해군 수뇌부를 날마다 질책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복수심만은 아니었다. 전황이 계속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미군의 [[사기(군사)|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군부와 국민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려면 뭔가 일본군한테 한 방을 먹여줄 필요가 있었다. 항공모함인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을 동원해서 [[마셜 제도]]와 길버트 섬에 [[마셜-길버트 공습|공습을 가하는 작전]]을 펴기는 했으나, 군사적으로는 큰 성과가 없고 주목할 만한 상징적인 가치도 큰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눈팔고 있다가 [[진주만 공습|뼈아픈 한방]]을 맞고서 시종 [[일본군]]에게 밀리고 있던 미군으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는 판이었다. [[미합중국 해군]] 태평양 [[함대]]에 사용 가능한 [[전함]]이 한 척도 없는 상황에서 몇 안되는 [[항공모함]]을 [[순양함]] 이하의 [[호위함]]과 같이 일본 근처까지 접근시키기에는 당시 [[일본 해군]]이 너무 막강했으며, 그나마도 개전 초반 괌과 웨이크를 빼앗기는 바람에 작전을 엄호해 줄 [[비행장]]이나 거점이 하나도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접근도 못하며, 무작정 갖다 박으면 성공을 따지기 이전에 제대로 접근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추가적인 대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식민지를 지키는 타국 해군 병력과 연합하여 [[자바 해전]]을 시도해 봤으나 그야말로 참패한 마당이었다. 그렇다고 오래 기다리기엔 정치적 압박은 물론, 일본 해군이 원하는 대로 미 해군의 물량이 갖춰지는 동안 태평양 섬들의 방어선이 강력해져 자칫 양면전쟁이 극단적 장기화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다가 일각에서 '''항모에 [[육군]] 항공대 [[폭격기]]를 싣고 가서 일본 본토를 폭격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나왔다. 기존의 [[함재기]]는 항속거리가 짧기 때문에 일본 본토에 항공모함을 가깝게 접근시켜야 하므로 기습전에 들켜서 격침당할 확률이 높지만, 육군 항공대의 쌍발 폭격기라면 항속거리가 길기 때문에 멀리서 발진시켜도 되므로 최악의 경우 작전이 실패하더라도 항공모함을 비롯한 함대는 살릴 수 있다는 의견이다. 이 의견을 낸 사람은 [[어니스트 킹]] 해군참모총장의 [[잠수함]] 참모인 프랜시스 로우(Francis S. Low) 대령이었다. 문제는 육군의 폭격기들은 무거워서 활주거리가 길기 때문에 항공모함에서 이함[* 일반적인 [[함재기]]가 항공모함에서 뜨고 내리는 건 기본적으로 발함-착함이라고 하나, 이 경우는 예외적으로 이함-착함이라 한다. 왜인지 하면, [[B-25]] 자체부터가 일반적인 함재기가 아닌 육상기지용 중형폭격기이다. 함재폭격용으로는 주로 급강하폭격기 위주였다.]시키는 것이 극히 곤란했고, 덤으로 착륙거리는 더 길기 때문에 사실상 착함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한번 이함하면 비행해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작전을 시작한 후에는 항공모함과 호위함대는 즉시 반전해서 위험지역을 탈출하고 폭격기만 혼자 목적지까지 가서 폭격을 한 후에 최대한 멀리 도망쳐서 비행기를 버리고 탈출 후 귀환하기로 결정되었다. 귀환 지역은 [[중화민국]]으로 선정되었고 사전에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협상을 해서 귀환 루트를 확보해 두었다. 둘리틀이 처음 제안한 작전은 폭격 후 기수를 북쪽으로 돌려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착륙하는 것이었다. 착륙 후 몰고 온 폭격기 전량을 [[무기대여법]]으로 넘기는 것을 조건으로 소련과 협상하였으나 당시 소련은 [[모스크바 전투]]에 승리하면서 독일군의 공세를 막는 데는 성공했으나 뒤이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반격계획이 실패하여 다시 전선이 밀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은 일본 본토를 공격한 미군 폭격기를 넘겨받을 경우 자극받은 일본이 소련을 침공할 것을 우려하여 거절하였다.[* 한창 전쟁 중인 유럽 전선과 블라디보스토크 또는 극동 지역은 단순히 전역이 확장되는 수준이 아니라 그야말로 극과 극의 거리였다. 또한 양면전쟁의 위험성도 안고 있기에 당연히 거절. 잘못하면 소련은 좌독일 우일본의 샌드위치가 되어 양쪽에서 두들겨맞을 수도 있다. 실제로 1941년 모스크바가 함락될 위기에 처한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소련군은 일본군이 쳐들어 올 걸 걱정하여 극동 지역의 병력을 동부전선으로의 차출을 꺼렸으며, 차출 이후에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최소 30개 사단 이상의 병력을 극동 전선에 그대로 배치했다.] 소련에 거절당한 후 차선책으로 중국에게 입질을 넣어봤는데 중국에서도 처음에는 반대가 심했다. 잘만 하면 미국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는데도 중국이 처음에 거절하려고 한 이유 역시 잘못되면 불똥이 자기들한테 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되기도 했다.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어르고 달래서 겨우 합의를 본 것이다. 결국 [[중화민국]] 저장성(장강 하류지역)을 향하는 것으로 계획은 수정된다. 본래 계획은 저장성에서 재보급 후 일본과 싸우고 있던 중화민국의 [[수도(행정구역)|수도]] [[충칭]]까지 날아가서 귀환하는 것이었으나, 예상비행거리보다 훨씬 긴 거리를 비행하게 되며 작전계획이 빗나가면서 연료 부족으로 목적지까지 도달하지 못해 [[논]], [[밭]] 등에 불시착하게 된다. || '''특공대 1번기의 승무원들''' || ||[[파일:B0DPsh9.jpg|width=100%]]|| || {{{-2 앞줄 왼쪽부터 제임스 H. 둘리틀 [[소령]](조종사), 리처드 E. 콜 [[중위]](부조종사), 뒷줄 왼쪽부터 헨리 A. 포터 중위 (항법사), 프레드 A. 브레머 [[중사]] (폭격수), 폴 J. 레너드 중사 ([[항공기관사]])}}}[* 이 중 항공기관사 폴 J. 레너드 중사만 유일하게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 해당 지역이 아군 따위는 하나도 없는 적지 한복판인 데다 먼 바다 위에서 파도에 흔들거리는 좁은 항공모함 갑판에서 거대한 폭격기를 이륙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진짜 '''엘리트급 조종사'''가 필요했고 작전을 지휘할 사람으로 항공기 레이스인 [[슈나이더]]컵 대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슈나이더컵 대회를 모델로 한 작품인 [[붉은 돼지]]의 미국인 조종사 커티스의 모델이 바로 슈나이더컵에 출전하던 시절의 둘리틀 중령이다.]에서 우승을 차지한 경력이 있는 당시 제임스 해럴드 둘리틀 육군 항공대 중령이 선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